항상 떠날 준비가 돼 있다는 것. 그리고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는 것. 창업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의 예외없이 이 두 가지로 시작된다. 거기서 시작해 창업가들은 기회를 만들어 간다. 그들은 알고 있다. 기회는 절대로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이 누가 가져다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필요한 사람이 직접 움직일 때 기회란 것도 다가온다.
박기현 둡 대표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론 기득권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그는 움직여야 할 때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행운은 함께할 사람이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템보다 중요한 건 ‘이끄는 힘’
1998년 대구 능인고 재학 시절, 학생 박기현은 친구인 최원석과 처음으로 ‘뭔가’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이른바 잉크두닷컴(www.inkdoo.com). 쉽게 말하면 오마이뉴스와 비슷한 사이트라고나 할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글을 올리는 것을 보면서 보람과 희열도 느꼈다. 하지만 학생이라는 신분상의 제약이 이 서비스의 본격적인 사업화를 어렵게 했다.
두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갔다. 박기현은 서울대 응용생물학과 01학번으로 입학했고 최원석은 펜실베이니아주립대(Penn. State University)에 들어갔다. “이과생이었지만 입학할 때부터 저는 비즈니스에 더 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대학 입학 후 바로 휴학했습니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난한 형편도 아니었다. 그가 휴학하고 사업을 해봐야겠다고 한 것은 학비를 벌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었다. 서울대생이면 과외를 하기는 쉬웠을 터. 그런데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목적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과외는 하기 싫더라고요. 돈은 쉽게 벌 수 있었겠지만 제가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래서 대전에서 물건을 떼어와 서울에서 파는 사업을 했습니다.”
그가 택한 상품은 세탁용 세제. 대전에 있는 공장에서 물건을 받아 서울 아파트 단지에 와서 부녀회를 통해 팔았다. 그가 포장도 안 된 세제를 포대 자루째 팔면 부녀회에서 이것을 아파트 단지에서 저렴하게 주민들에게 판매하는 식이었다. “시중에서 파는 세제와 똑같은데 가격은 10분의 1밖에 안됐죠. 꽤 잘 팔렸습니다.”
그런데 돈은 별로 벌지 못했다. 3개월 정도 하면서 생활비 정도만 건졌을 뿐이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차를 빌려 물건을 날랐는데 트럭 운전이 익숙지 않아 사고가 잦았고 수습 비용이 더 들었다.
첫 사업을 통해 교훈을 얻은 그는 미국에 있는 친구 최원석에게 연락했다. 당시 최원석은 미국에서 라크노라(Raknoa)라는 유학생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었다. 유유상종이라고 해야 할지. 최원석도 휴학한 상태였다. 라크노아는 페이스북의 초기 상태와 유사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알게 됐습니다. 사업은 아이템도 중요하지만 그 아이템을 끌고 나갈 힘이 더욱 중요하다고요.” 비슷한 처지에 있게 된 두 사람은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2002년 말 최원석이 귀국했을 때 박기현은 세탁물 커버를 이용한 광고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세탁소에서 세탁물을 보호하기 위해 씌우는 커버에 광고를 하면 어떨까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 커버만 연간 1억 장이 넘게 돌아다닌다는 것에 착안한 것. 그런데 사업 전 특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엉뚱하게도 다른 사업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변호사들끼리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사이트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잘되지 않았다. 사업 진행이 여의치 않자 두 친구는 일단 군대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2005년 한 중소기업에 병역 특례로 입사했다. 이듬해 박기현은 NHN게임스로 옮겨 병역 특례를 이어갔고 최원석은 병역 특례를 마치고 2009년 에이팜스(Apalms)라는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 박기현은 NHN이 인수한 웹젠으로 옮겨 해외 사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NHN게임스와 웹젠을 거치면서 전략기획, 해외사업 기획 등을 담당했던 것은 박기현에게 중요한 경험으로 축적됐다. 하나하나의 사업 아이템에 골몰하던 그에게 시장의 흐름을 보고 사업을 구상하는 기반을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절친’이 다시 용감하게 사업을 하는 것을 보면서 박기현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잉크두도 그랬고 라크노아도 그랬고, 시도는 괜찮았는데 기회를 이어가지 못한 것 같다.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다.” 두 사람은 결국 힘을 합쳐 사업을 하기로 했다. “인생에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큰 기회가 왔다. 모바일에서 온 기회는 놓치지 말자.”
유명 연예 기획사와 계약 마쳐
박 대표가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웹젠을 나온 것은 2011년 8월. 그 당시 개인 사업 형태였던 에이팜스는 이미 ‘궁합’이라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와 로케이션 노트(Location Notes)라는 서비스를 출시해 좋은 반응을 얻은 상황이었다. 2010년에는 붐 셰이크(Boom Shake)라는 소셜 뮤직 게임을 출시해 미국 아이튠즈 스토어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박 대표가 합류하면서 사명을 둡으로 변경하고 정식으로 법인도 설립했다. 이후 케이팝 스타들의 음원을 활용한 리듬 액션 게임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처음 슈퍼주니어의 음원을 기반으로 나오기 시작해 현재까지 16개의 국내 음원을 기반으로 한 리듬 액션 게임이 출시돼 있다. ‘뮤지션 셰이크(Musician Shake)’로 명명된 이 게임은 앞으로 ‘한류’ 스타들의 모든 음원을 대상으로 확장될 예정이다. SM엔터테인먼트를 비롯해 JYP엔터테인먼트·YG엔터테인먼트 등 유명 연예 기획사와 모조리 계약하고 출발했다.
출시부터 반응이 좋아 지난 1월 캡스톤파트너스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뮤지션 셰이크’는 한류 스타의 음원에만 매달리지 않을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전 세계 어디서나 음악이 새로 나올 때마다 간단하지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관련 게임을 개발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아예 새로 음반을 내는 가수 누구나 이것을 만드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만들 수 있도록 발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둡은 리듬 액션 게임에 집중하고 있지만 게임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 창업자인 최 대표가 특화돼 있는 분야가 SNS이기 때문이기에 둡은 소셜 서비스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회사명과 같은 둡이 그 자체로 SNS 플랫폼이 되는 그런 서비스다. 시기는 7월 말~8월 초. 박 대표는 “의미 있는 대화가 있는 소셜 서비스”라고 힘줘 말했다.
의미 있는 대화가 있다? 무슨 뜻일까. 동행한 최백범 마케팅 매니저에게 힌트를 달라고 요청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합쳐 놓은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이해하기 빠를 겁니다. 하지만 일회성의 의미 없는 그런 대화들이 아니라 대화들이 축적돼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그런 새로운 방식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임원기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wonkis@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